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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juana,Mexico 2020.03-/일상

열두번째 글, 티노즈

지난주 목요일 저녁, 티노의 아르헨티나 친구가 티후아나에 왔다
꼬꼬마 시절 동네 친구로 만났다가 친구의 이사로 잠시 헤어졌다가 청소년 시절 우연히 재회해 같이 운동도 하고 티노가 멕시코에 오기 전까지 같이 체육관도 운영했다는 고향 친구이자 형제와 다름 없다는 친구
주짓수 블랙벨트(주짓수 벨트 중 가장 높은 단계, 보통 7-10년 걸린단다) 보유자로, 티노가 자기가 아는 대부분 주짓수 기술은 이 친구에게 배웠단다


거의 3주간 시시때때로 곧 친구 온다, 다음주 목요일이래, 저녁 7시쯤 도착한대,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한대, 지금은 멕시코 시티래, 목요일 잊으면 안돼 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던 티노
티노 부탁으로 티후아나 도착 후 숙소 들어가기 전 며칠 우리집에서 지내기로 한터라 주말에 티노가 직접 온 집안 청소를 하더니 대망의 목요일 오후에는 체육관 조퇴까지 하고 장을 봐와서 세상 가파른 우리집 언덕길을 10kg 에 달하는 물+식재료 이고지고 걸어 올라오는 의지를 보여줬다

쨌든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고, 시간 여유가 있어 한국슈퍼에 들러 공항 도착
공항 내부에서 연결되어 국경 너머 산디에고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출구와 티후아나-산디에고 사이의 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공항 주차장 꼭대기층에 주차를 하고 방금 착륙했다는 친구 메시지에 부지런히 입국장으로

최근 향수병을 아주 쎄게 앓고 있던 티노가 안절부절 초조한 표정으로 입국장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친구 찾느라 기웃기웃 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짠하기도 했다
비행기 착륙했다는 얘기를 들은지 20분이 넘도록 친구는 안보이고, 수하물 기다리느라 늦나봐 하는 내 말에 부치는 짐 없이 온다 했다며 연신 입국장을 훑는 티노의 초조한 눈빛 (최소 6개월 잡고 오는데 분명 짐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친구 어떻게 생겼니, 무슨 옷 입고 오는지는 알아?
-아니, 근데 내가 딱 보면 1초만에 알아볼 수 있어
-그래그래, 아마 비행기 착륙게이트가 멀어서 나오는데 오래 걸리는가봐, 아니면 혹시라도 다른 출구로 잘못 간건 아니겠지?
-다른 출구가 있어....?(동공지진)
-ㅇㅇ, 산디에고로 바로 나가는 통로 있는데 아닐거야, 착각하기 쉽지 않을걸

뭔가 더 초조해진 티노는 핸드폰 메시지와 입국장 자동문을 연신 바라보고 슬슬 지루해진 나는 공항 바깥 쪽을 보며 돌아서던 찰나 티노한테 붙들려 있던 내 손이 풀려나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입국장 앞의 친구를 끌어 안고 있는 티노가 보였다, 감격한 티노와 마치 큰형처럼 토닥토닥 티노를 받아주던 든든한 체격의 친구

입국장에서 나와 4층짜리 주차장 꼭대기층에 주차해둔 차를 찾으러 가는 짧은 길 그간 서로의 안부부터 고향 친구들과 가족들 안부을 끊임 없이 주고 받는 둘 사이에서 거센 꼬르도베(아르헨티나 꼬르도바 지역의) 억양의 홍수 속에서 주차장에 도착

-에르마노(Hermano:형제,브라더) , 내가 진짜 멕시코 티후아나까지 와서 이렇게 너를 만나다니 믿을 수가 없네
-에르마노, 나도 마찬가지라구, 봐바 저 장벽 너머는 바로 미국 산디에고라구, 에르마노
-말도 안돼, 이렇게까지 미국이 가깝다고? 아주 코 앞이구만,에르마노
-에르마노, Ana 네 집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금방 미국 국경 검문소가 있다구, 진짜 가깝다구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 공항 건물에서 뻗어나온 통로 보이지? 저리로 쭉 따라가서 저쪽 출입구로 나가면 저기 산디에고야(티후아나 공항내에서 통로로 이어져 산디에고 방면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다)
-????????진짜로??? 공항에서 산디에고로 나간다고????? 말도 안돼 (몇번이나 얘기해줬는데 새삼 놀라는 네가 더 놀라워)
-말도 안돼, 이건 인증샷을 안 찍을 수가 없네, 사진 하나 찍어줘 에르마노

한국어로 옮겨 적으니 큰 감흥이 없지만 짙은 꼬르도바 억양으로 소소한 비속어 섞인 감탄사들을 호들갑스레 내뱉는 두 티노즈를 보고 있자니 꽁트를 보는 양 씰룩씰룩 입꼬리가 올라갔다
티노 친구 티노2는 가뜩이나 다부진 체격에 이번에 머리까지 빡빡 밀고 와서 모르는 사이라면 길에서 가능한 눈 안마주치고 지나칠 인상인데 며칠 같이 다니다보니 조금더 똘똘한 티노 느낌 물씬...그래서 티노2로 쓰기로

집에 와서 잠깐 짐 정리하고 9시가 다 된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 바베큐 그릴에 고기 구워 저녁까지 먹고 마무리 된 하루

다음날인 금요일은 나는 회사로 , 티노즈는 같이 체육관으로 출근

토요일은 운전면허 갱신 하느라 티노즈를 두고 아침 일찍 먼저 나갔더랬다
Cita(예약) 을 잡고 갔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고 갱신된 새 면허 찍어내기만 기다리는 중에 티노에게 연락이 왔다

-Ana, 어디야
-아직 면허증 기다리고 있어, 거의 다 끝나가, 너네는 뭐해
-우리 Rio 플라자 가려구, 슬슬 걸어가볼게 (영화관,마트,상점들 모여 있는 소박한 플라자)
-????? 11시에 운동 간다 한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 우리 플라자에 가 있을게
-나 거의 끝나가는데, 1시간이면 집 갈텐데, 거기 생각보다 멀어,언덕길 내려가는 것만 해도 20분 넘게 걸려
-괜찮아, 둘이 같이 슬슬 가면 돼, 플라자에서 만나
-그냥 나 기다리는게 나을건데.. 길은 확실히 알아?
-그럼그럼, 걱정하지말고 이따 봐

우리 집은 경사로만 2.3km 쯤 되고 그 중 절반은 정말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올라가는 것도 당연히 힘들지만 걸어서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내내 다리며 허리에 힘이 빡 들어가는 가파른 길인데.... 예전에 주말에 한번 티노랑 언덕 걸어 내려가 근처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 하고 거기서 또 15분쯤 걸어 Plaza까지 간 적이 있기는한데 문제는 토요일은 그보다 날씨가 더웠고, 집-플라자까지 한번에 가려면 4km 조금 덜 되는 거리인데 티노가 길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구글맵 같은거 잘 못쓰는 기계치...)

쨌든 혼자는 아니니까 별 일 있겠나 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면허 받고 전날 완전 터져버려 스페어로 바꿔둔 타이어도 새로 사서 교체 하고, 주말의 교통 체증을 뚫고 가다보니 이미 한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고...플라자 도착까지 15분 남짓이라 미리 전화를 했다, 안 받는다.. 뭐 아직 제법 남았으니....도착 5분전 다시 전화, 또 안받는다...1시간이 훌쩍 지나 기어간게 아닌 이상 못 도착했을리 없는데.... 다시 전화, 안받음, 또 전화, 안받음, 핸드폰 어디 잊어버린건 아니겠지...할부도 안 끝난걸.... 슬슬 짜증이 났다 ... 음성메시지 -혹시 아직 플라자 안도착했니? 나 거의 다왔는데 연락 안되면 그냥 나 다른데 가서 커피나 한잔 하고 온다- 라고 남겼지만 이미 플라자 진입로여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주차장을 한바퀴 돌며 다시 전화... 10통 조금 넘을 무렵 드디어 연결...
-어디니
-Ana! 우리 이제야 언덕길 다 내려왔어! 아휴, 여기 왜이렇게 멀어
-.......뭔소리야, 왜 이제 내려왔어, 언제 나왔어 집에서? 아 됐고, 어디 지나고 있어
-우리 La Cacho 지나고 있어! (언덕길 내려오면 있는 동네 이름..)
-La Cacho 어디 지나냐고, 거기가 무슨 길 이름이야? 어느 골목이나 상점 지나고 있느냐고, 전화는 왜 안받은거니?
-화내지 말아....우리 La Cacho 지나는데....걱정하지마, 금방 갈 수 있어, 주머니에 있어서 전화온줄 몰랐어
-아니 그래서 La Cacho 어디냐고, 얼마 걸리는데, 너 거기서 여기 어떻게 오는지는 진짜 알아?
-우리 여기 지난번에 왔던 식당옆에 코너에 까페 있고 샐러드가게 맞은편..그러면 너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
-내가 거길 왜가(목소리 한톤 더 높아짐), 너 전화 안 받아서 이미 플라자 들어왔는데 그럼 주차비만 내고 또 나가니?
-아니야아니야, 우리 걸어서 금방 가, 나 길 알아, 화내지 말아, 근데 여기서 왼쪽으로 꺽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되지?
-(말잇못...) 니가 어디 쳐다보고 서 있는줄 알고 왼쪽,오른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니? 진짜 왜 그러는거야, 내가 멀다고 했지? ....아, 됐고 걍 거기 꼼짝말고 있어
-아니야, 우리 진짜 금방 걸어갈게, 길 진짜 알아, 화내지 말아, 금방 갈게
-아니, 그냥 가만히 있어, 커피나 한잔 마시든 뭐하든 그냥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아오, 이럴 줄 알았다, 차피 면허 받고 플라자 가는 길 중간쯤에 집이 있어서 그냥 집에 기다렸으면 되는데 길도 모르면서 뭘 걸어온다고 나와서는 전화도 안 받아서 길은 엇갈리고 다시 또 교통 체증 뚫고 돌아가게 만들어ㅡㅡ 하면서 분노로 가득한 채로 티노즈 픽업을 갔는데... 묘하게 꼬질꼬질 지친 행색으로 나무 그늘 아래 화단 부분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니 언짢은 와중에 또 웃겨서 입꼬리 씰룩씰룩.....

-아니,진짜 우리가 너랑 통화하고 금방 집 정리 좀 하고 나왔는데 언덕길이 진짜 긴거 알았어? 그르치, 에르마노??
-아유, 언덕이 아주 가파르고 길더라구
-내가 길다고 했잖아, 내려오기 힘들다고 했지, 지난번에 너랑 나랑 내려올 때도 너 힘들어했지..됐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플라자는 별로 볼게 없어 간단히 아점이나 먹고 오후에는 한시간쯤 거리 해수욕장 다녀 옴...
한시간 걸려 간 해수욕장에서 티노2는 1.5시간동안 꿀잠 자고 바닷물에는 발가락도 안 담그고옴...ㅋㅋㅋ

오는 길에 장 봐와서 저녁에는 해물순두부찌개 끓임, 애호박 파전에 군만두, 순두부찌개, 우리집 오면 그냥 내가 요리한거 먹어야 됨, 밥공기가 작은 것뿐이라 각자 밥 2/3 공기쯤 담고 그냥 그 위에 순두부찌개 떠서 먹었는데 티노2는 금방 한그릇 비우더니 맛있었다며 그릇 내려두기에 예의상 한 말이고 사실은 입에 잘 안맞나하고 나 혼자 한그릇 더 떠와서 먹는데 만두랑 부침개 먹느라 뒤늦게 밥공기 비운 티노가 에르마노, 밥 더 먹을래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밥그릇 내미는 티노2를 보고 그냥 나한테 부탁하기 머쓱해서 였구나 잘 먹네 둘 다 참....하고 뿌듯
전날 피자 먹는데도 둘이 나란히 양파 골라내가며 먹더니 순두부찌개에 있는 양파랑 애호박은 호로록 호로록 잘도 먹어서 편식하는 애들 밥 먹이는 뿌듯함으로...ㅋㅋㅋ
배불리 먹고 뚱땅뚱땅 둘이 치우면서 주방으로 들고 간 순두부찌개 냄비에서 새우 건져 먹는거보고 정말 어쩜...싶게 닮은 티노즈...

배불리 저녁 먹고 오늘은 토요일이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으니 아주 양껏 술을 마시겠다며 이해해주라던 티노와 티노2는 350ml 맥주 12병과 감자칩,도리토스를 잔뜩을 들고 꼭대기층 으로 올라 갔고 뒤늦게 올라가보니 야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나란히 의자 놓고 앉아 그 사이에 아르헨티나 가요를 틀어두고는 시덥 잖은 얘기들로 낄낄 신나서 놀고 있었다

티노 친구는 티노집도 아닌 우리집에 신세 지는걸 되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지만 오랜만에 긴장감 없이 해맑게 낄낄 대는 티노 보니까 덕분에 잘 됐다 싶기도 하고 나도 한국에 있는 얼굴만 봐도 웃긴 오래된 친구들 생각도 나고 그랬다

이번 주말에는 체육관에 티노보다 더 먼저 와있던 또다른 아르헨티노까지 초대해서 3티노즈랑 바베큐 하기로
벌써부터 기대되는 티노즈 완전체.... 참고로 이 티노 2와 3도 아르헨에서부터 친구였지만 티노2가 체육관에 처음 도착한 날 서로 4번이나 엇갈려 지나가면서도 못알아봤다고 한다....그 와중에 티노는 알려주지도 않고 구경만...ㅋㅋㅋ


뒷모습만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듬직한 티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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